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런던 vs 파리 사교계 (무도회, 여성 역할, 드레스코드)

by mynote7713 2025. 3. 28.

흔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의 시기는 유럽에서 사교문화의 황금기로 불립니다. 특히 영국에선 런던이, 프랑스에선 파리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상류층과 귀족들이 활발히 교류하는 사교계의 심장이 됐습니다. 이 글에서는 런던과 파리의 사교 문화를 무도회와 여성의 역할, 드레스 코드 중심으로 비교해보겠습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상류층에서 열린 무도회 이미지입니다.

무도회와 사교 행사

파리에선 무도회가 예술과 감성의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무도회는 주로 저녁 모임이나 만찬 이후에 열렸으며 춤과 음악이 어우러졌습니다.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예절이 엄격히 지켜졌고 대화는 주로 감성적인 것 위주였습니다. 무도회와 함께 주목할 만한 사교 행사는 살롱이었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들이 주최하기 시작한 살롱에선 철학자, 시인, 과학자, 예술가, 외교관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초청되어 서로 교류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후로 살롱은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토론장이 됐습니다. 사적인 공간에서 매우 고상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각종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주최자인 여성의 사회적 활동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무도회와 대비되는 런던의 무도회는 계층과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영국의 상류층은 소위 시즌이라고 불리는 사교 기간을 중심으로 사교 일정을 계획했습니다. 런던 시즌은 보통 4월에서 7월 사이였습니다. 이 시기에 귀족 자녀는 결혼 시장에 나오게 되고, 귀족간의 정치적 네트워킹이 형성됐으며,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이 기간에는 무도회 뿐 아니라 오페라나 연회같은 다양한 사교 행사가 열렸는데 초청을 받는 기준은 철저히 가문의 지위에 따라서였다고 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파리는 살롱 중심의 지적이고 예술적 성격의 사교 활동이 활발했던 반면 런던은 대저택이나 귀족 클럽을 중심으로 격식 있는 사교가 성행했습니다.

사교 공간과 여성의 역할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열렸던 살롱이 여성들의 주최로 열렸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사교계에서 여성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살롱을 주최하거나 주도하는 상류층 여성을 살롱니에르라고 부릅니다. 살롱니에르의 주도하에 당대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정치가들, 학자들이 살롱에서 만남을 가졌고, 이런 지적 교류는 자연히 문학, 철학, 예술 등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살롱의 예로 마담 드 스탈의 살롱이 있습니다. 마담 드 스탈은 그녀의 살롱을 통해 유럽 지성계를 움직였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여성의 사교 역할이 보다 제한적이었습니다. 영국에서도 귀부인들이 무도회나 티파티 등을 열었지만 그 목적이 대부분 결혼을 중매하거나 가문의 명예를 위한 의례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뷔탕트무도회는 귀부인들이 자신의 딸을 소개하기 위한 무도회입니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귀족 여성들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상류층의 결혼 시장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파리 여성들은 사교계에서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자유로운 지적 사교 공간을 형성한 반면, 런던의 여성들은 보다 보수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두 사회의 여성 모두 사교 활동의 기저에 가문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프랑스 여성들은 이를 지식 기반 네트워크형성을 통해 이루고자 했고, 영국 여성들은 혼인 중심 네트워크형성을 통해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교계의 드레스 코드와 에티켓

먼저 사교 행사에서의 드레스 코드에 있어 프랑스와 영국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사교 복장은 예술적이면서 개성의 표현 수단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여성들 사이에서 고전적인 실루엣의 엠파이어 드레스가 유행했고, 이 드레스들은 레이스, 실크, 자수 등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됐습니다. 모나자 부채, 향수 같은 액세서리도 필수였습니다. 색상은 계절과 행사 성격에 따라 달랐습니다. 남성들은 조끼와 재킷, 레이스 셔츠와 무릎 바지, 가발을 착용했는데 복장에 매우 정성을 쏟았습니다. 반면 영국의 사교 복장에선 규범과 전통이 우선시됐습니다. 예를 들어 데뷔탕트 무도회에선 여성들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장갑과 티아라를 착용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남성의 경우 검정색 테일 코트, 조끼, 넥타이, 실크 해트가 필수였습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 사교 클럽이나 공적인 저녁 모임에서 드레스 코드에 대한 예의를 매우 엄격하게 준수했습니다. 다음으로 에티켓과 관련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프랑스에선 세련된 대화술과 시적 표현이 중시됐습니다. 또한 손 인사, 시선 처리, 앉는 자세에까지 예술적 감각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국에선 신사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말수를 절제하며 침착해야 한다는 등의 영국식 억제의 미학이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결론

18~19세기의 파리와 런던의 사교계는 권력과 정보, 결혼과 명예가 뒤섞여 있는 복잡한 사회 시스템이었습니다. 또한 그 시대의 문화가 응축된 곳이었습니다. 파리는 예술과 철학, 대화와 감성이 융합된 사교의 중심지였고, 런던은 전통과 신분, 규범을 기반으로 한 계급 사교의 무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시기 사교계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