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국 vs 프랑스 귀족 결혼 (풍습, 지참금, 관습)

by mynote7713 2025. 4. 6.

18세기 내내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배우자 선택 문제라기보다 가문의 명예와 재산,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문제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 사회에서도 결혼을 가문 간의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풍습, 지참금, 혼인 관습 등에선 약간씩 차이를 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18세기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귀족 결혼이 어떠했는지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8세기 유럽 귀족의 결혼식 이미지입니다.

귀족 결혼 풍습: 가족 간 계약에서 사랑 없는 혼인까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선 결혼의 주된 목적이 정치적, 경제적이었습니다. 결혼으로 가문 간에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의 낭만적 사랑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영국 귀족 사회에서는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이 가문, 재산, 혈통, 종교 등이었는데 18세기에는 가문 간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가치였습니다. ,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게 되는 상대 가문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에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동등하거나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곳이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의사는 크게 고려될 수 없었습니다. 부부가 결혼 후에 사랑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런던 상류층에서는 사교 시즌 동안 혼사 상대를 물색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결혼 상대를 찾고 결혼식을 올릴 땐 귀족 계층 안에서만 초대객을 선정했고 성대한 교회 예식과 사교적 만찬이 진행됐습니다. 이런 영국의 결혼 풍습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 귀족 사회의 결혼은 훨씬 더 정략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때로는 결혼 당사자들이 결혼 당일까지 서로 본 적조차 없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의 결혼은 법률적 계약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양가 부모와 변호사가 직접 관여하여 서면 계약서를 작성했고 이를 통해 결혼이 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계약서에는 지참금 액수, 상속 재산 분배, 결혼 후 재산 소유권 문제, 자녀 출생 시 가문의 권리 및 책임 사항 등이 포함됐습니다. 결혼식은 교회 예식을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영국과 프랑스의 결혼은 모두 가문 간의 연합이 주된 목적이었고 이는 기존의 귀족 사회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참금 문화: 재산으로 맺는 동맹

지참금은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 결혼 모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는 신부 측 가문이 신랑 측 가문에 제공하는 재산이나 현금을 가리키는데, 결혼 자체의 성사 여부도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영국을 먼저 보겠습니다. 영국에서는 신부의 지참금이 곧 가문의 경제력과 협상력을 의미했습니다. 지참금의 액수에 따라 더 높은 지위의 유력 가문과 결혼할 가능성이 생겼고 결혼 후에 신부가 더 많은 생활 자금이나 재산 권리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지참금은 결혼이라는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협상 도구였습니다. 결혼 후엔 지참금이 종종 부부의 공동 자산으로 편입되거나 신랑 가문의 투자금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아내의 재산은 남편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어 실질적 소유권은 남편에게 이전됐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상류층 여성들은 때로 별도의 계약을 해서 재산 일부를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프랑스의 지참금을 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지참금 제도는 훨씬 체계화되어 있어서 혼인 계약서에 지참금의 규모, 지급 방식, 상속 조건 등이 모두 명시됐으며, 재산권 보호가 더 엄격했습니다. 특히 도트라 불리는 지참금은 이혼, 사별, 남편 파산 등의 경우 신부가 돌려받을 수 있는 돈으로 여성의 경제적 안전망 기능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더라도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 부유한 평민 여성과 결혼해 이를 회복하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관습과 혼인 후 삶의 차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귀족 여성들이 결혼 후 어떤 역할들을 관습적으로 요구받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귀족 여성들은 자녀를 양육하고 사교 행사를 주최하고 자선 활동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교계에 가문의 대표자로 나서서 가문의 평판을 관리하고 사교 모임을 주최하며 인맥을 다지고 사교계 영향력을 확대해서 남편의 정치적 활동을 보조해 줄 것을 기대받았습니다. 일부 여성들은 지적인 활동에 참여하거나, 유명한 살롱의 운영자로 활동하거나, 문학 후원자로 활약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법적으로 종속된 존재였으며 이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강해서 이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영국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에선 결혼이 훨씬 더 형식적인 제도였습니다. 결혼에 대해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고 대를 잇는 기능이 집중적으로 강조됐기 때문에 사적인 연애는 분리된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기혼자의 연애를 묵인하기도 했으며, 일부 여성은 후계를 낳은 뒤엔 결혼 상태를 유지한 채 남편과 별거해서 독립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화로 인해 결혼은 계약이고 연애는 자유라는 프랑스 특유의 사회 가치관이 형성됐습니다. 두 나라를 비교했을 때 결혼 후의 삶에서 프랑스 여성이 보다 개방적인 분위기를 누렸고 영국 여성은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이처럼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결혼은 가문 간의 연합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영국의 결혼이 가문의 명예 중심적으로 이뤄졌다면 프랑스의 결혼은 법적 계약의 성격을 띠고 이뤄졌습니다. 지참금과 결혼 후의 관습 면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귀족 결혼 문화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