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은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며 각자의 화폐 시스템과 금융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나라의 18~19세기 화폐 체계와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영국 화폐제도: 금본위제 기반
18세기에 영국은 화폐 체계를 점진적으로 개혁해가며 안정화를 도모했습니다.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된 화폐 체계는 ‘파운드 스털링’으로 영어로는 Pound Sterling이라 합니다. 이 체계에서는 화폐의 실질 가치가 금이나 은의 함량에 따라 결정됐습니다. 예를 들어 1실링의 실제 가치는 그 은화 속 은의 양만큼 이었습니다. 1파운드라는 단위도 이런 은화 20개가 모인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오며 은화 공급이 부족해지고, 위조 화폐가 만들어지거나, 전쟁으로 경제가 압박되는 등의 문제로 화폐의 신뢰성이 흔들리게 됐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97년 ‘은행 유예령’이란 법령이 만들어집니다. 영란은행이 금 보유랑과 관계없이 지폐만 발행하고 이를 금화로 교환해주지 않아도 되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이후 1816년 ‘금본위제’가 정식으로 채택됐습니다. 이로 인해 화폐가 금과 직접 연동되었고, 이는 국제무역의 안정성과 통화 신뢰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21년부터 금본위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영국 화폐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통화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영란은행은 사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며 발권력을 통해 금융 시스템을 조율했고, 이는 근대 금융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안정성과 국제적 신뢰는 영국의 산업혁명, 식민지 무역 확대와 맞물려 파운드 스털링을 세계 금융의 중심 통화로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화폐제도: 복본위제 운영
프랑스는 영국과는 달리 더 많은 정치적 변동을 겪으며 화폐 정책도 여러 실험적인 변화를 거치게 됩니다. 먼저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귀족 자산을 몰수하고 외부와의 혁명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아시냐’라는 지폐가 발행됐습니다.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발행하며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국민의 화폐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저하시켰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프랑스는 1803년 나폴레옹 정권 아래에서 금과 은을 모두 화폐 기준으로 삼는 ‘복본위제’를 도입합니다. 복본위제는 금과 은을 법정 비율로 정해 통용하게 함으로써 통화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1803년 당시에는 1단위의 금이 곧 15.5단위의 은이라는 공식을 사용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은 공급이 원활해서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금 가격이 변동하고 유럽 내에서 점차 금본위제가 확산되면서 점차 비효율적인 방식이 됐습니다. 1848년에는 ‘프랑스 은행’이 설립되며 중앙은행 체제가 마련됐고 이를 통해 화폐 유통과 신용을 관리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오면서 프랑스는 금 중심 정책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했지만, 복본위제를 공식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에 금본위제 국가들과의 환율 및 금융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때가 있었습니다.
유럽 경제에 미친 영향
영국과 프랑스의 화폐 체계는 유럽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국들이 이 두 나라를 모델로 자국의 통화 정책을 설계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1865년에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와 ‘라틴 화폐 연맹’이란 국제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연맹국 간에 금과 은의 법정 비율을 통일하여 서로의 화폐를 동일 가치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는 추후 준회원과 비공식 가입국이 추가되면서 유럽 내 복본위제 확산에 영향을 미치고 연맹국 간의 협력을 촉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50년 가까이 지속됐지만 국제적 화폐 체제가 점차 금본위제 위주가 되면서 한계에 부딪힙니다. 영국의 경우엔 1816년에 금본위제를 법적으로 채택한 뒤 1821년부터는 실제로 금과 지폐의 교환을 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폐 가치를 일정량의 금과 연동시켰기 때문에 영국 화폐의 국제적인 신뢰도가 상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은 해운과 무역 중심의 국가였기 때문에 금과 연동된 영국의 파운드는 국제 상업에서 매우 매력적인 통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이점 덕에 19세기 중반부터는 영국이 국제 금융 체제에서 주도적 위치에 올랐고, 파운드 스털링도 주요 결제 통화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결론
18~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화폐제도는 각각의 역사적 배경과 정책 기반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금본위제의 선도자였던 영국과 복본위제를 실험한 프랑스의 사례는 오늘날 금융 정책의 방향성과 화폐 제도의 유연성에 대해 깊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